민주화기념사업회에서 "돌봄과 놀이를 통한 민주주의 소통 워크숍:민주주의, 몸과 마음을 돌보다"를 신청했다. 아직 강사양성과정도 끝나지 않았는데, 비록 하루지만 약간의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제목에서 "놀이"가 핵심단어로 보였다. 즉, 주로 온종일 몸을 쓸 거 같다는 것이었다. 진행을 하는 변화의 월담은 몸을 도구화하는 문화를 넘어 몸의 목소리와 활력을 회복하는 바디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하는 스타트업 기업이다. 활동가 단체같기도 하고,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교사연수, 각종 교육, 자체 교육을 이미 많이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발을 만지는 것에서 시작했다. 꼭 쥐어보고, 벌려보고, 주무르게 했다. 발 뒤꿈치에 무게를 60을 두고, 발 앞부분에 30, 발가락에 10을 두는 느낌으로 서보고, 한편 다리에 무게를 싣고 다른 한편 다리를 위와 아래, 둥그렇게 돌려 움직였다. 젠가를 발뒤꿈지에 쌓아가 변하나는 무게를 느껴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짝을 정해 작은 공을 주고 받는데, 던지는 거리와 방향을 달리 하고 상대에게 신호를 주고 상대는 그에 반응한다. 그러다 공의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짝이 바뀌는 식이다.
순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파트너가 끈이 달린 작은 공을 위, 아래 또는 좌우, 원형으로 돌리면 빈 공간에 자신의 움직임을 채워 넣는 것이다. 팔을 밀어 넣기도 하고, 몸통을 넣다 빼기도 하고, 옆으로 비켜 나가기도 한다. 강사들은 몸이 움직이는 형태가 곡선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딱딱한 나무 토막같이 움직임과 움직임이 딱딱하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렸다.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는 강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오후부터는 허리가 너무 아팠다. 디스크였다. 허리를 부여잡고도 계속 움직였다. 희안한게 별 말을 하지 않는데도 파트너와 소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 동네 공터와 골목을 뛰어 다니며 친구들과 얼음땡, 숨박꼭질을 하던 기억이 났다. 땀을 뻘뻘흘리면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며 신나게 웃고 떠들던 기억이다. 요즘은 몸으로 노는 일이 거의 없고, 주로 입으로 떠들고 입으로 먹고 마신다. 어렴풋이 사슬이 느슨해진 느낌, 작은 틈이 벌어진 것 같았다.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것에 예민하고 조심하다 보니, 몸으로 표현하는 좋은 감정 표현, 호의도 낯설어졌다. 일로 만난 사이, 위계가 있는 사이는 거리가 있다. 거리를 좁히는 것도 일방의 생각대로 하면 안되다 보니 더 섬세하게 접근하고 배려하기보다는 그냥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한 방법을 선택한다. 놀이로 소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운동을 안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활동이 수십년만이었다. 엉덩이 쪽이 뭉치고 눈이 감길 정도로 노곤했다. 이런 피로는 정말 생소하다. 다음날 일요일도 온종일 정신을 못차렸다. 이런 활동을 여러번 배워보고도 싶고 정기적으로 이렇게 놀면 긴장과 긴장으로 인한 관계에서 불편함, 예민함이 줄 것도 같다.
그냥 오랫동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 하지만 따지고 들면 그 원인이나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추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제주 4.3. 도 그렇다. 국가가 조직적으로 빨갱이를 잡아들인다고 일반인들까지 제주민 3만여 명이 죽었다는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오래전 알던 제주 출신 친구도 그의 삼촌 중 하나가 그렇게 죽었다고 했다. 내가 제주를 처음 갔던 20대 후반에도 제주 바다는 너무 아름다워서 과거의 비극은 멀고 추상적이기만 했다. 그렇게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2018년으로 기억한다. 4월초 제주여행을 왔다가 마침 4.3. 기념식을 해서 참석했다. 마침 문재인대통령이 참석해서 정말 사람이 많았다. 차가 너무 막혀 평화공원 멀리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야 했고, 멀리서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인상에 남는 한 장면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큰 벽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서럽게 흐느끼는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4.3. 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임을 알게 된 때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 프로그램중에 4.3. 다크투어가 한나절 잡혀 있어서 북촌마을 너븐숭이기념관에 가게 되었다. 자료를 보고 정리한 4.3.의 맥락은 이렇다. 해방 이후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일제부역자들이 여전히 국가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미군정이 통치에 그들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민중의 기대를 배신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그 시대에 미국과 이승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해방 후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을 가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각자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를 하고 분단 정부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정치활동은 제주도 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민들의 자발적 조직인 인민위원회는 전국에 만들어졌는데,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가장 오래 존속되었고, 이는 자영농 비중이 높아서 관계가 더 평등한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을 피해 일본으로 많이 도망갔고, 거기서 교육을 받으며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꽤 됐다고 한다.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긴장이 높아지고 1947.3.1. 제주시 기념대회 때 시위대에 민군정 경찰이 발포해서 민간 민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정에 책임을 묻는 제주도민의 총파업이 시작되어 학생은 학교를 가지 않고 공무원과 교사는 출근하지 않고 시장과 가게는 문을 닫았다. 강제진압방침을 세운 미군정은 이들을 잡아들이고 서북청년단을 들어오게 하여 테러와 약탈을 일삼게 만들었다. 이는 반발과 분노가 쌓여 1948.4.3.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4.3.은 1947.3.1.부터 1954.9.21.한라산 금족령 해제된 시기까지로 본다.
북촌마을 학살은 1949.1.17. 단 하루동안 마을주민 400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근처를 지나가던 국군을 무장대가 공격해 2명이 사망하자 국군은 인근 북촌마을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 아이들, 갓난아기, 노인 가리지 않고 총살을 한 사건이다. 당시 생존자인 고완순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날의 오후 태양과 고인 핏물이 만져진 느낌을 70년이 지난 지금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 죽인 옴팡밧에 지금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이후 4.3.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타지에 나가 살다가 나이가 들어 돌아오고서도 한참이 지나서 4.3.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행방불명된 외삼촌, 크게 울어 시끄럽다고 국군 곤봉에 머리를 맞아 죽은 동생... 고완순님은 당시 9살이었고 그가 딱히 원하는 것도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의 동생도 아기였고, 동네 머슴의 아내였던 만삭의 임산부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교전상태도 아니고 적진도 아니고 무방비 상태인 민간인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북촌마을 옴팡밧 학살터,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다. 쓰러지 주검처럼 소설 속 내용을 쓰러진 비석에 새겨 넣었다.목시물굴 입구, 다른 편에 이보다 훨씬 작은 구멍이 있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산짐승이 파 놓은 작은 구멍정도. 탐방간 이들 중 몇명은 가이드를 따라 들어갔다. 불꺼진 동굴 안에서 두려움보다 안전한 느낌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날의 사람들도 그랬을까?
살기 위해 산속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숨어있던 목시물굴에 가봤다. 입구가 너무 좁아 들어가는 걸 포기했다. 이 굴도 국군이 주민들을 고문해서 찾아내고 숨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자신의 이념적 선택도 있지만, 무차별적 학살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중에도 투항하는 적들을 살려주지 않나
우리는 2차대전 중 벌어진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알고 있다. 국가 관료체계에 의해 조직으로 자행된 그 집단 학살이 범죄행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나아렌트는 이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란 유명한 표현을 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 '악'은 특별한 악당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속에도 있다라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아렌트는 멍청함이라고 설명했다. 자기한테 주어진 일을 고민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무능함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그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히만과 달리 나치의 집단 학살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사직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사형을 당하기도했다.
비슷하게 제주 4.3.의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3.1.절 기념식 발포와 총파업에서 박경훈 제주도지사는 항의성 사직서를 내며 희생된 인민에게 조의를 표하였다. 4.3. 봉기 이후 제주주둔군 9연대 김익렬 중령은 평화협상을 이끌어 점진적 무장해제와 무장대 신변보장을 합의하였으나 미군정의 방해공작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후임운 일본군 소위 출신 박진경 중령이었다. 그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모두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말한 사람이다. 지배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임무이고 그들이 시키는 일은 다 정의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후 강경토벌이 진행되고, 몇 달 뒤 대령으로 승진하여 이를 축하는 파티를 한 날 박진경은 결국 부하들에 의해 암살된다. 상사를 암살한 문상길 중위는 처형당하면서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전범들은 줄줄이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거나 형을 살았다. 당시 나치들은 남미 아르헨티나로 많이 도망갔고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 잡혀와 재판을 받고 처형당해 바다에 뿌려졌다. 전후 일본의 전범들도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권선징악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국군이 전쟁시기도 아니고 교전상태가 아님에도,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그 과정과 책임자를 밝히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다. 아이히만은 재판장에서 자신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시키는 일을 한 것, 그 과정 중 일부를 담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는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심문과정에서 따귀를 한대 때린 기억에 큰 양침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수용소로 유대인을 적시에 더 많이 실어나를 창의적인 발상을 한 것은 단지 열심히 일한 것 뿐이었다. 살인과정의 일부를 담당한 현장 책임자가 있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승인한 진짜 책임자가 있다. 진짜는 살인을 한 적이 없을 것이다. 현장책임자도 지시를 하고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책임자가 아닐 수 없고 합법적인 지휘명령체계에 따른 명령을 수행했다고 해서 살인이 아닐 수 없다. 법적절차를 거치지 않은 국가살인을 목숨을 걸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라는 불의는 앞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국가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여러 이념과 이상이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게 경쟁하던 시대에 우세한 권력에 반대한 사람들이 투쟁을 하고 패배해가던 그 시대에 저편에 있었던 사람들을 지금은 우리의 과거가 아닌가. 수년동안 진행된 토벌 결과 희생자는 14,533명,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5천 명에서 3만 명이라고 한다. 지금도 북한 김일성의 사주로 발생한 폭동이라며 희생자의 순결함을 평가한다. 빨갱이 몰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북촌마을 위령비 상단에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새겨져 있을 정도이다. 다른 세상을 꿈꾼 사회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단독정권수립과 매국정권에 반대한 민족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반발하거나 도망갔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이유가 그 비극의 희생자가 되지 못할 단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들 모두가 우리의 과거이다.
세석대피소는 너무 좋았지만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초저녁에 4시간 정도 자고 나서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촛대봉 일출을 보고 장터목대피소로 향한다. 높은 봉우리를 잇는 아름다운 길과 숲길, 바위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었지만 뒤를 돌아보면 산들이 파도처럼 겹겹이 이어져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여주어다. 그래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아름답다 느낀 처음 경험이었다.
7시가 조금 지나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고 내려온 사람, 종주를 하는 사람들, 백무동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다 모여서 앉아 밥먹기도 어려웠다. 핫앤쿡을 먹고 사과도 먹고 나니 기운이 났다. 사실 이틀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힘이 딸리면 장터목에서 내려가려고 했는데, 힘이 났다. 그래서 천왕봉을 올라갔다. 지난 4월에 왔을 때보다 덜 힘들었다. 그때는 백무동에서 올라오느라 이미 지쳐서였던 것 같다
천왕봉 가는 돌길
태양은 머리 바로 위에서 열기를 쏟아 내었다. 너무 덥고, 뜨겁다. 장터목에서 물을 2병을 채웠지만 이정도면 하산길까지 부족할 것 같다. 고도를 쭉쭉 높혀 장터목을 출발한지 1시간20분만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정상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냥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어제부터 계속 본 경관인데도 신기하고 새롭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저 멀리 골짜기에 마을이 보이고, 또 산이 이어진다. 험하고 깊지만 사람이 기대어 살 수 있는 산... 가까워 보이는데 멀리 있고, 아득해 보이지만 걷다 보면 도착할 수 있다. 뭔가 이 산은 가만히 어깨를 두드리고 지지해주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더 긴장된다. 중산리길은 가장 빠른 하산길이고, 지난번에 너무 정신없이 먹은 수제햄버거를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어서 힘들지만 중산리로 다시 내려왔다. 환경교육원에서 중산리 탐방센터 마을 버스를 늦어도 1시40분 차를 타야 하기에 지난번에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 쉬지 않고 내려왔다. 9시20분경에 하산을 시작했으니 늦어도 1시에는 도착할 것 같아 여유가 있었지만 늦을까 겁이 나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쉬는 이들을 부러워하며 내리 걸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 길은 나같은 사람에게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시간이 비슷했다. 발목과 무릅이 많이 아팠다.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 위축됬지만, 그들을 쫓지 않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내 수준에 맞춰서 조심하며 발을 딛는데, 내가 봐도 참 어설프다. 그렇게 발을 딛으면 다치기 딱 좋게 불안정하다... 하... 정말 중심을 못 잡고 휘청대니 발목이 꺽일 수 있다.
법계사, 로타리대피소에서 환경교육원이 칼바위 방향보다 덜 험하다고 하는데, 이 길도 경사가 꽤 있다. 이전 길에 비하면 양호하지만, 3시간만에 고도를 1천미터 이상 낮추는 것이라서 3시간동안 급경사를 계속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입장이라 올라가는 사람들보다 좀 낫기는 한 것 같다. 한낮의 더위는 그냥 있어도 땀을 흐를텐데, 많은 사람들이 이 험하고 힘든 길을 즐겁게 오르고 있다.
12시30분에 환경교육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12시 그 시간대는 기사님의 식사시간이어서 마을버스가 배차되지 않는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1시 정도 마을버스가 와서 사람들을 내려 놓더니, 얼른 타라고 한다. 정해진 시간 외에도 사람들이 모이면 태워서 올라오는 모양이다. 어차피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왕복하는 거니까. 운좋게 1시에 버스를 타고 내려와 다시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갔다.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터미널까지 1.7킬로를 걸어야 하는데 산이 아닌 곳에서, 다른 대안이 있는데 더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이 변화무쌍한 마음이란... 총 16키로 이상, 13시간을 걸었는데, 포장된 길 20분을 걸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3시30분 버스시간까지는 여유가 많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도 마시고 좀 씻으니 살 것 같다.
소고기패티가 맛있고, 양파가 아주 많이 들어가고 많이 비싼 햄버거
수제 햄버거를 먹으며 1박2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았고 정신적으로는 좀 강해진 기분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위한 영양제를 주입한 느낌이랄까... 좀 행복해졌다.
체력이 강하지 못해서 산행을 해도 몹시 느리다. 그러려니 하고 시간을 충분히 잡고 가야한다. 지난 4월 백무동에서 장터목, 중산리 산행을 할때 꼭 대피소에서 자보고 싶었다. 세석 대피소를 예약하고 백무동에서 출발했다. 한신계곡을 옆에 두고 시원한 물소리와 햇빛을 가리는 무성한 나무들 덕에 땀은 비오듯 흘렸지만 쾌적했다. 시원한 계곡 바람이 살살 땀을 식혀주었다. 길도 완만해서 산책나온것 같았다
가내소폭포한신계곡 초입
그렇게 3시간이 되가면서 길은 가팔라지고 너덜길이 이어졌다. 햇빛은 너무 강하고 더웠지만 그래도 길같았다. 역시 그러려니 하고 1시간이 지나면 끝나겠거니 하며 가다보 하늘이 열렸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세석대피소 도착 30분전
출발 4시간30분만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덥긴 더운 날이었다. 올라오며 물 2통을 마셨으니... 세석대피소는 시설이 너무 좋다. 웬만한 도미토리보다 더 깨끗하다. 심지어 화장실이 수세식.
저녁밥을 먹고 누워 쉬는데 사람들이 계속 들어온다. 잠에서 깨서 나가보니 로비에도 자는 남자 사람들이 여럿이다. 수면공간이 덥고 답답해서 그런다고 한다. 처음엔 몰랐는데 사람이 차니 좀 답답하기는 하다. 그래도 로비에 여자는 없는 것을 보니,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가 보다. 자다가 나와서 지리산 야경은 예상대로 별이 총총 떠 있고 북두칠성도 보인다고 한다. 나는 눈이 나빠서 안 보인다. 그저 별이 많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세석대피소 야경촛대봉 일출
세석에서 20분정도 가면 촛대봉이다. 일출을 꼭 보겠단 마음은 아니었지만 4시40분정도 출발했다. 밝아지고 하늘에 붉은 띠가 생기고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촛대봉이구나 했다. 수많는 산능선과 구름속에서 떠오른 해는 마치 바다위에서 떠오르는 것 같다. 능선과 구름이 겹겹 파도처럼 보인다.
그녀들과 설악산 대청봉을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작년에 혼자서 대청봉을 오르고 나서 나눈 이야기가 자신은 할 수 없다였으니까. 족저근막염으로 못한다 포기했는데, 등산스틱을 사용하게 되면서 통증이 사라졌다고 도전하게 되었다. 이러저런 장비를 사고 버스표를 예매했다 취소하며 결국 보라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
새벽 3시 출발, 용산에 만나기로 했는데, 보라언니가 오지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고... 20분정도 지났나... 그녀는 자다가 전화를 받았다. 너무 놀라 정신없이 차를 가지고 나와서 출발했다. 토요일 새벽에 우린 출발했다. 6시가 조금 넘어 오색 도착, 김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한계령 휴게소로 이동해서 7시 정도에 출발했다. 그 시간에 출발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생각같아선 더 일찍 출발해야 했다.
한계령 초입에서 나름 일출을 보았다. 이때 사진 찍는 태영이를 보며 더 멋진 풍경을 볼거라고 찍지 말라고 장담했다.
한계령 길은 오색 코스보다 더 힘들었다. 더 험하고 길고 멋진 경관을 보며 갈 수 있지만, 너덜길이 이어지고 사족보행을 해야 하는 길도 많았다. 5시간 걸린다는 중청을 태영이와 나는 6시간30분만에 도착했다. 천천히 여유있게 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경관은 한계령을 기준으로 한쪽은 맑음, 한쪽은 구름이 자욱했다.
멋진 고사목
너무 아름다웠던 길이다. 파란 하늘, 늦가을에 마른 잎이 떨어진 돌길이 멋있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 긴 시간을 몰랐기에 더 기분이 좋았다.
한편에선 이런 웅장한 모습이 너덜길을 위태롭게 걷는 힘겨움을 잊게 해주었다.
중청으로 갈수록 파란 하늘은 없어지고 대청봉에 올라서도 구름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작년에 본 멋진 하늘과 산세, 속초시내와 동해바다까지 푸른 산과 하늘이 어우러지던 그 날은 얻어 걸린 날이었다.
대청봉에 오르고, 대청봉을 보았다. 그때가 2시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구름속 습기인지, 빗방울인지, 머리도 젖어가고 서둘러 내려왔다. 내리막길을 조심히 내려오다 보니 1시간에 1키로를 내려왔다. 오색이 5키로 이니, 이대로면 5시간이 걸리고 중간에 해가 진다. 걱정스러워 서두르기 시작했지만, 결국 5시가 넘으면서 어두워졌다. 랜턴을 켰지만, 오색의 내리막길은 너무 생각보다 위험했다. 작년에 오를때는 힘들었지만 위험하지는 않았다. 무시무시한 오르막 돌길은 내려갈때 보니 심하게 울퉁불퉁했고, 잘 보이지도 않았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태영이는 모르는 이들의 발끝에 불을 비춰주었다. 속도는 더 느려졌고 완전히 어두어져서야 내려왔다. 너무 비싼 랜턴을 샀다고 뭐라 했었는데 그 대단한 밝은 빛으로 타인의 발끝을 비춰주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다리도 발도 너무 아팠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고... 9시간 걸린다는 그 길을 우리는 12시간 걸렸다. 그래도 다행이고 덜 힘들었다. 아마도 함께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이날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2022년 10월 29일... 나와 친구들이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고 온 날에 이태원 할로윈 축제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믿을 수 없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오랜만에 뒷산을 걸었다. 비교적 짧은 등산코스여도 가파른 경사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아무 생각없이 오르다 문득 내려갈까 하는 유혹이 일어난다. 그 순간을 참고 생각없이 걷다 보면 능선에 오르고, 다시 오르고 내려가고를 반복한다. 그러다 문득 힘들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힘이 없는 것 같았는데 몸 안에서 힘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2022년 9월 백운대를 바라보는
여러번 같은 길을 걸으며 이 자리에서 백운대를 바라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아래 연보라 쑥부쟁이 꽃이 잔뜩 피었다. 그날 산능선에는 쑥부쟁이가 신나게 피어있었다.
쑥부쟁이들
뜨거운 햇빛에도 산능성은 시원했고 계곡물소리는 경쾌했다. 두 다리가 힘들게 고된 땀을 흘려야만 시원한 바람소리, 물소리를 느낄 수 있다. 항상, 변함없이 그렇다. 기억에 남는 흔하지 않은 아름다움도 그렇다.
여행이라고 할수 있을까? 나의 취향과 달리 좋은 경관을 보고 움직이는 건 나의 방식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언니는 반가웠다. 십수년만에 만난 그녀는 아이를 셋이나 키워내느라 많이 고생했고, 그래서인지 몸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난 아이를 낳아보지도 키우보지도 않아서 그 어려움을 잘 모른다. 그 시간을 살아내고 여전히 짐을 지고 걷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젊은 시설 강하고 에너지 넘치던 모습은 찾기 어렵고 아주 수용적이고 말이 없어졌다. 아주 많이 받아들이기만 했던 시간탓이었을까? 그런 삶에 나의 삶은 가볍고 부끄럽기도 하다. 행복을 위해선 아무런 짐도 지지 않아야 한다는 나의 믿음은 나의 삶을 가볍게 했고 선택을 쉽게도 했다. 한편으로 세상에 나를 묶어두는 사람이 없게도 만들었다. 나는 지금 죽어도 남겨져 있어 걱정할 사람이 없다.
이번에 거의 가보지 않았던 곳을 가봤다. 뚜벅이 여행탓에, 또 그저 그런 관광지라고 밝히는 장소는 피해왔기 때문에 그랬다. 안도다다오의 건축물은 사진으로만 보다 지난번 섭지코지 글라스하우스를 처음 보고 감탄을 했었다. 제주 바다와 섬, 바람을 담아 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 본태박물관... 그동안은 산행을 하느라, 같이 간 사람들이 성향상 가지 못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감동받았다...하늘 아래 선과 면으로만 그려진 것 같았다. 그 끝에 가보면 그것이 공간임을 알수 있게 물이 흐르고 다음 면으로 꺽어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공간에 서 있다. 그 안에 담겨진 공예품이나 상여보다 이 건축물이 큰 감동을 주었다. 지금 다시 사진을 봐도 가슴이 차오르는 울림과 충만함이 있다.
본태박물관방주교회
그리고 위의 방주교회, 일요일에 와서 예배를 보고 싶다. 아름답기도 했고 물위에 놓인 방주에 타서 하늘 끝에 닿고도 싶다.본태박물관도 그렇지만, 방주교회도 제주 산간의 풍광과 이질적이지 않다. 주위 환경을 수용하고 건축
물을 지나 흐르게 하는 물이고 바람이고 돌이게 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도 물처럼, 바람처럼 잠시 머물렀다 흔적없이 지나간다. 이타미 준(유동룡)의 건축물이 근처 비오토피아 주택단지 내에 수풍석 뮤지엄이 있다고 한다. 제주시에서 특혜를 받아 공유지 도로를 일방적으로 막아 자신들 사유지에 일반인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 이기적이고 특권의식에 쌓인 이들이 머무는 고급주택단지이다. 그의 건축 철학과는 많이 이질적이다. 그와 달리 방주교회는 모두를 받아들이는 교회이니, 그에 정신에는 더 맞지 싶다.
바다, 입장료가 없고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바다, 아름다운 것은 흔하고 하찮은 데에 있기도 하다.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 2시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지난 겨울과 다르게 사람이 없어서 조금 무서웠다. 태영이가 없었다면 아마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앞에 희끄무레한 무엇이 사람으로 보여 긴장되 되고, 뒤에서도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지난 기억은 쓸모없이 길은 새롭다. 겨울산과 숲이 울창해진 여름 산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키큰 나무가 달빛도 가린 길을 친구에게 의지하며 걸어갔다. 험하지 않지만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꾸역 꾸역 올라 도달한 능선은 거칠고 매서운 겨울과 달리 따뜻했다. 봄이어도 좋았을것 같다. 내년 봄에도 시간을 내어 와야겠다.
태양도 더 크고 환한 것도 같다. 태영이는 인생 최고의 일출이라 한다. 땀흘려 애써야만 감동이나 기쁨이 크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한다. 아름다움도 내가 노력해야만 나에게 의미있어서 대가없이 주어진 것은 TV로 보거나 간접 체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나의 세상은 모두 다 내가 경험하고 만들어 온 의미들이 모인 것이다...
하늘과 닿아 있는 나를 찍은 그림자 ㅎ
낮에 삼척으로 이동했다. 추석당일이어도 삼척해변, 추암촛대바위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삼척은 아직 속초 만큼 가깝지 않아서 인지 덜 분주했다.
추암 촛대바위는 그저 그랬다. 바다속에서 솟아오른 것 같은 기암괴석이 눈을 끌기는 했지만,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러거야, 제주도에는 너무 흔하고 양양쪽 하조대나 부안 채석강이나 나름 흔한 풍경이다...
촛대바위보단 깨끗한 바다가 좋았다. 여름이 지난 바다는 한가히 몸을 담그고 놀만 했다.발만 담가보고 맨발로 모래를 걷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술 한잔 하며, 돌아본 바다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 보았다. 지는 태양의 잔상속에 달은 처음이었다. 우아하고 고귀한 느낌이다. 이 풍경만으로도 삼척에 굳이 온 의미가 있고, 또 다시 와서 며칠 있고 싶어 졌다. 그저 바다를 걷고 뜨는 해를 보고, 다시 달을 보고 걷고 싶어졌다. 그러다 커피도 마시고, 추운 바닷가에서 소주한잔 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