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석대피소는 너무 좋았지만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초저녁에 4시간 정도 자고 나서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촛대봉 일출을 보고 장터목대피소로 향한다. 높은 봉우리를 잇는 아름다운 길과 숲길, 바위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었지만 뒤를 돌아보면 산들이 파도처럼 겹겹이 이어져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여주어다. 그래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아름답다 느낀 처음 경험이었다.
7시가 조금 지나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고 내려온 사람, 종주를 하는 사람들, 백무동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다 모여서 앉아 밥먹기도 어려웠다. 핫앤쿡을 먹고 사과도 먹고 나니 기운이 났다. 사실 이틀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힘이 딸리면 장터목에서 내려가려고 했는데, 힘이 났다. 그래서 천왕봉을 올라갔다. 지난 4월에 왔을 때보다 덜 힘들었다. 그때는 백무동에서 올라오느라 이미 지쳐서였던 것 같다
태양은 머리 바로 위에서 열기를 쏟아 내었다. 너무 덥고, 뜨겁다. 장터목에서 물을 2병을 채웠지만 이정도면 하산길까지 부족할 것 같다. 고도를 쭉쭉 높혀 장터목을 출발한지 1시간20분만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정상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냥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어제부터 계속 본 경관인데도 신기하고 새롭다.
저 멀리 골짜기에 마을이 보이고, 또 산이 이어진다. 험하고 깊지만 사람이 기대어 살 수 있는 산... 가까워 보이는데 멀리 있고, 아득해 보이지만 걷다 보면 도착할 수 있다. 뭔가 이 산은 가만히 어깨를 두드리고 지지해주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더 긴장된다. 중산리길은 가장 빠른 하산길이고, 지난번에 너무 정신없이 먹은 수제햄버거를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어서 힘들지만 중산리로 다시 내려왔다. 환경교육원에서 중산리 탐방센터 마을 버스를 늦어도 1시40분 차를 타야 하기에 지난번에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 쉬지 않고 내려왔다. 9시20분경에 하산을 시작했으니 늦어도 1시에는 도착할 것 같아 여유가 있었지만 늦을까 겁이 나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쉬는 이들을 부러워하며 내리 걸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 길은 나같은 사람에게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시간이 비슷했다. 발목과 무릅이 많이 아팠다.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 위축됬지만, 그들을 쫓지 않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내 수준에 맞춰서 조심하며 발을 딛는데, 내가 봐도 참 어설프다. 그렇게 발을 딛으면 다치기 딱 좋게 불안정하다... 하... 정말 중심을 못 잡고 휘청대니 발목이 꺽일 수 있다.
법계사, 로타리대피소에서 환경교육원이 칼바위 방향보다 덜 험하다고 하는데, 이 길도 경사가 꽤 있다. 이전 길에 비하면 양호하지만, 3시간만에 고도를 1천미터 이상 낮추는 것이라서 3시간동안 급경사를 계속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입장이라 올라가는 사람들보다 좀 낫기는 한 것 같다. 한낮의 더위는 그냥 있어도 땀을 흐를텐데, 많은 사람들이 이 험하고 힘든 길을 즐겁게 오르고 있다.
12시30분에 환경교육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12시 그 시간대는 기사님의 식사시간이어서 마을버스가 배차되지 않는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1시 정도 마을버스가 와서 사람들을 내려 놓더니, 얼른 타라고 한다. 정해진 시간 외에도 사람들이 모이면 태워서 올라오는 모양이다. 어차피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왕복하는 거니까. 운좋게 1시에 버스를 타고 내려와 다시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갔다.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터미널까지 1.7킬로를 걸어야 하는데 산이 아닌 곳에서, 다른 대안이 있는데 더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이 변화무쌍한 마음이란... 총 16키로 이상, 13시간을 걸었는데, 포장된 길 20분을 걸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3시30분 버스시간까지는 여유가 많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도 마시고 좀 씻으니 살 것 같다.
수제 햄버거를 먹으며 1박2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았고 정신적으로는 좀 강해진 기분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위한 영양제를 주입한 느낌이랄까... 좀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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