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오랫동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 하지만 따지고 들면 그 원인이나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추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제주 4.3. 도 그렇다. 국가가 조직적으로 빨갱이를 잡아들인다고 일반인들까지 제주민 3만여 명이 죽었다는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오래전 알던 제주 출신 친구도 그의 삼촌 중 하나가 그렇게 죽었다고 했다. 내가 제주를 처음 갔던 20대 후반에도 제주 바다는 너무 아름다워서 과거의 비극은 멀고 추상적이기만 했다.  그렇게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2018년으로 기억한다. 4월초 제주여행을 왔다가 마침 4.3. 기념식을 해서 참석했다. 마침 문재인대통령이 참석해서 정말 사람이 많았다. 차가 너무 막혀 평화공원 멀리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야 했고, 멀리서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인상에 남는 한 장면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큰 벽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서럽게 흐느끼는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4.3. 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임을 알게 된 때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 프로그램중에 4.3. 다크투어가 한나절 잡혀 있어서 북촌마을 너븐숭이기념관에 가게 되었다. 자료를 보고 정리한 4.3.의 맥락은 이렇다. 해방 이후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일제부역자들이 여전히 국가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미군정이 통치에 그들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민중의 기대를 배신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그  시대에 미국과 이승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해방 후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을 가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각자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를 하고 분단 정부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정치활동은 제주도 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민들의 자발적 조직인 인민위원회는 전국에 만들어졌는데,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가장 오래 존속되었고,  이는 자영농 비중이 높아서 관계가 더 평등한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을 피해 일본으로 많이 도망갔고, 거기서 교육을 받으며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꽤 됐다고 한다.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긴장이 높아지고 1947.3.1. 제주시  기념대회 때 시위대에 민군정 경찰이 발포해서 민간 민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정에 책임을 묻는 제주도민의 총파업이 시작되어 학생은 학교를 가지 않고 공무원과 교사는 출근하지 않고 시장과 가게는 문을 닫았다. 강제진압방침을 세운 미군정은 이들을 잡아들이고 서북청년단을 들어오게 하여 테러와 약탈을 일삼게 만들었다. 이는 반발과 분노가 쌓여 1948.4.3.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4.3.은 1947.3.1.부터  1954.9.21.한라산 금족령 해제된 시기까지로 본다.

북촌마을 학살은 1949.1.17. 단 하루동안 마을주민 400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근처를 지나가던 국군을 무장대가 공격해 2명이 사망하자 국군은 인근 북촌마을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 아이들, 갓난아기, 노인 가리지 않고 총살을 한 사건이다. 당시 생존자인 고완순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날의 오후 태양과 고인 핏물이 만져진 느낌을 70년이 지난 지금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 죽인 옴팡밧에 지금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이후 4.3.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타지에 나가 살다가 나이가 들어 돌아오고서도 한참이 지나서 4.3.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행방불명된 외삼촌, 크게 울어 시끄럽다고 국군 곤봉에 머리를 맞아 죽은 동생... 고완순님은 당시 9살이었고 그가 딱히 원하는 것도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의 동생도 아기였고, 동네 머슴의 아내였던 만삭의 임산부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교전상태도 아니고 적진도 아니고 무방비 상태인 민간인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북촌마을 옴팡밧 학살터,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다. 쓰러지 주검처럼 소설 속 내용을 쓰러진 비석에 새겨 넣었다.
목시물굴 입구, 다른 편에 이보다 훨씬 작은 구멍이 있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산짐승이 파 놓은 작은 구멍정도. 탐방간 이들 중 몇명은 가이드를 따라 들어갔다. 불꺼진 동굴 안에서 두려움보다 안전한 느낌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날의 사람들도 그랬을까?

살기 위해 산속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숨어있던 목시물굴에 가봤다. 입구가 너무 좁아 들어가는 걸 포기했다. 이 굴도 국군이 주민들을 고문해서 찾아내고 숨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자신의 이념적 선택도 있지만, 무차별적 학살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중에도 투항하는 적들을 살려주지 않나 

우리는 2차대전 중 벌어진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알고 있다. 국가 관료체계에 의해 조직으로 자행된 그 집단 학살이 범죄행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나아렌트는 이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란 유명한 표현을 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 '악'은 특별한 악당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속에도 있다라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아렌트는 멍청함이라고 설명했다. 자기한테 주어진 일을 고민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무능함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그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히만과 달리 나치의 집단 학살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사직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사형을 당하기도했다. 

비슷하게 제주 4.3.의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3.1.절 기념식 발포와 총파업에서 박경훈 제주도지사는 항의성 사직서를 내며 희생된 인민에게 조의를 표하였다. 4.3. 봉기 이후 제주주둔군 9연대 김익렬 중령은 평화협상을 이끌어 점진적 무장해제와 무장대 신변보장을 합의하였으나 미군정의 방해공작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후임운 일본군 소위 출신 박진경 중령이었다. 그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모두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말한 사람이다. 지배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임무이고 그들이 시키는 일은 다 정의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후 강경토벌이 진행되고, 몇 달 뒤 대령으로 승진하여 이를 축하는 파티를 한 날 박진경은 결국 부하들에 의해 암살된다. 상사를 암살한 문상길 중위는  처형당하면서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전범들은 줄줄이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거나 형을 살았다. 당시 나치들은  남미 아르헨티나로 많이 도망갔고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 잡혀와 재판을 받고 처형당해 바다에 뿌려졌다. 전후 일본의 전범들도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권선징악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국군이 전쟁시기도 아니고 교전상태가 아님에도,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그 과정과 책임자를 밝히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다. 아이히만은 재판장에서 자신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시키는 일을 한 것, 그 과정 중 일부를 담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는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심문과정에서 따귀를 한대 때린 기억에 큰 양침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수용소로 유대인을 적시에 더 많이 실어나를 창의적인 발상을 한 것은 단지 열심히 일한 것 뿐이었다. 살인과정의 일부를 담당한 현장 책임자가 있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승인한 진짜 책임자가 있다. 진짜는 살인을 한 적이 없을 것이다. 현장책임자도 지시를 하고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책임자가  아닐 수 없고 합법적인 지휘명령체계에 따른 명령을 수행했다고 해서 살인이 아닐 수 없다. 법적절차를 거치지 않은 국가살인을 목숨을 걸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라는 불의는 앞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국가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여러 이념과 이상이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게 경쟁하던 시대에 우세한 권력에 반대한 사람들이 투쟁을 하고 패배해가던 그 시대에 저편에 있었던 사람들을 지금은 우리의 과거가 아닌가.  수년동안 진행된 토벌 결과 희생자는 14,533명,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5천 명에서 3만 명이라고 한다. 지금도 북한 김일성의 사주로 발생한 폭동이라며 희생자의 순결함을 평가한다. 빨갱이 몰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북촌마을 위령비 상단에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새겨져 있을 정도이다.  다른 세상을 꿈꾼 사회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단독정권수립과 매국정권에 반대한 민족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반발하거나 도망갔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이유가 그 비극의 희생자가 되지 못할  단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들 모두가 우리의 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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