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적이고 부정적 상황속에서 마음은 더 산만해져 갔다. 간신히 기대고 있던 나의 목표와 계획은 이 상황속에 다시 밀려들어갈 것 같았다. 
외롭고 복잡한 마음으로 만나 이 책은 나를 객관화하고 내 마음속 슬픔과 부조리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먼저 이 책은 아주 미국적이다. 아메리칸스타일... 왜냐하면 개인의 삶, 성취와 비극을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구조적 문제를 거의 설명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사회적 해결적으로 공산주의체제의 폭력과 비인간화를 나치즘과 같은 수준으로 비판한다. 인간이 표방한 선한 목표 이면에 있는 이를 실천하는 인간들의 마음, 성향이 이상적 목표를 처참한 비극으로 몰아간다고 말한다. 관련해서 이타심의 이면에 시기심이나 원한에 의한 복수심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방대한 내용 중 이 말만 떼어내어 주제로 삼으면 조선일보식 비난도 충분히 가능하다. 숭고한 희생과 열정을 매도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 주장을 정의롭고 바람직한 슬로건을 실천하는 인간의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내면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책의 주제는 나약하고 상처입은 인간이 끊이지 않는 고통속에서도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회와 정치의 책임을 다루지 않는다고 사회탓 하지 말고 개인이 노력해야 한다라는 상투적인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상황에서 보자면, 인권이나 노동권을 개인의  방패삼아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권리의 소비자들이 난무하는 상황에 너무 신물이 나서 저자인 조던B 피터슨의 이야기에  더 공감을 하는 것도 같다.  체제와 구조 탓을 하기 위해 개인을 너무 무력한 피해자로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구조가 바뀌지 않는한, 권력이 바뀌지 않는한 개인은 비극적 상황에 빠져 있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정의를 독점하고 확증편향을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정의는 상대적이므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랑할 것,  큰 변화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서 변화시켜야 한다. 이 점에서 마음에 새겨진 글이 있다. 
" 만약 당신이 이미 모든 것이고 어디에도 있다면, 굳이 가야 할 곳도 없고 굳이 뭔가 되려고 목표로 삼을 것도 없을 것이다. 과거에 존재할 수 있던 모든 것이 결국에는 존재하고, 과거에 일어날 수 있던 모든 사건이 결국에는 일어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한계가 없으면 어떤 이야기도 없으며, 어떤 이야기도 없으면 삶이 없다. ~ 그러나 존재와 한계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 기억해야할 가르침이 있다. "(471쪽)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여도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만 바퀴로 쓰임새가 있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도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만 그릇으로서 쓰임새가 있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들더라도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만, 방으로서 쓰임새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472쪽, '노자, 도덕경, 11장 비어있음으로 로 쓰임이 있다.')
인생은 고통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과정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고통을 유발하는 존재를 지워내면 사라질 줄 알고 문제로 지정하고 베어내는 선택을 해왔지만, 그것으로 다음, 다음의 문제에 계속 대응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깨닫게 되는 만틈 문제는 커지고 복잡해졌다. 이젠 베어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나 자신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그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면 고통도 없고,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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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데기로 동급생의 생살을 지지면서, 그의 비명을 들으며 히히덕거리는 아이들은 악마의 모습이었다. 멸시하고 학대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 가진 모습 중 하나임을 알지만, 사회는 가학적 욕망을 통제하고 비교적 건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편들도 발전시켜 왔다.  가학적 욕망이 통제되지 않고 여러 부정적 성격들과 환경들이 결합되었을때,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도 권력과 뇌물로 무마시켰을때 학폭 같은 것들, 여러 갑질들이 재발되고 확산되어 버린다. 돈이 경제생활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나 사법 영역으로, 교육의 영역으로 흘러 갔을때 이런 꼴이 나고 만다.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아이가 동료로부터 학대를 받고도 구조받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린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 때문에 죽으려고 할때, 그를 살린 건 복수였다. 복수는 삶의 목적이 되어, 공부도 대학도 교사도 남자도 오직 복수과정에 종속되어 버렸다. 와신상담이란 고사가 떠올랐다. 인간관계가 주는 위로와 즐거움으로 복수를 잊을까 장작더미에서 자고 쓸개를 씹는 자기학대로 그녀는 인간들의 유혹을 이겨나간다. 오직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그 이유로 살아가는 것이 납득되었다. 복수할 이유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살아가지 못했다. 구원받지 못했던 삶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었다. 

유튜브에서 잠시 본 참 끔찍한 단편영화가 생각난다. 어떤 사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제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살인자는 피해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되어 간다. 그 과정은 사지를 하나씩 자르고, 그 다음에는 눈을 뽑고, 장기를 하나씩 적출해 간다. 치료를 하면서 회복되면 하나씩 신체를 파괴해가는 것이다. 처음 큰 소리를 치던 살인범은 점차 눈에 초점을 잃고 두려움에 떨며 다음의 파괴를 기다린다. 한번에 죽이는 것보다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와 절망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이다.  두려운 시간을 길게 겪게 하면서 벌하는 것인데,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참담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도 똑같이 황폐하게 변해갔다. 분노로 가득찬 이들은 가해자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도 초점을 잃고 망가져 갔다.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바뀌었다.  

피해자 문동은은 살기 위해, 살아가야 할 이유로 복수를 정하고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갔다. 그녀가 가해자가 되는 날 복수는 완성될 것이다. 어른이, 교사가, 학교가, 사회가 고통받는 개인을 구원하지 않을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꿈꿀 수 밖에 없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매일 그 상처를 긁으며 복수하는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복수를 하는 그녀는 순간 순간 행복을 느끼나 행복한 가해자들에 비해 황폐하고 왜소하다. 항상 싸구려 김밥을 먹으며 마른 장작처럼, 칼날위에서 쉬는 것처럼 날카롭고 메말라 있다. 허깨비 처럼, 복수심에 영혼과 몸을 내어준 것도 같다.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지켜야 할 때 허깨비에 피가 돌고 영혼이 돌아와서 사람이 될 것이다. 복수가 끝이 났을때, 그녀가 피와 살이,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으면 한다. 그래야 복수를 하고도 행복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 모습은 어린 예솔이를 지키는 것이나, 가정폭력 희생자인 강현남과 그의 딸을 보호하는 것, 주여정을 살리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해자들과 다른 선택을 해야 그녀가 파괴되지 않고  복수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드라마 환혼은 말장난이 유치하고 열망이 과장되어 있기도 하다. 판타지 무협물이고 로맨스이고, 복수극이자 성장극이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흐르는 기본은 권력에 대한 욕망과 이를 위해 약자를 착취하는 '죄'에 대한 것이다. 작가가 실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한다.

너무 웃기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깊은 사회비판이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지만, 그 기준이 아니고는 전체 서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직접 환혼을 통해 착취를 한 가해자는 반드시 죽고,  마지막에 과한 욕망을 추구해 세상을 짓밟는 가문들의 수장들을 장욱이 모두 불태워 죽여버리는 장면은 사실 부패한 기득권을 몰살시키는 장면으로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또 소극적으로 부패를 방조하거나 숨겨준 사람들도 반드시 속죄의 행위, 죽음을 감수하고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를 해야만 다시 살 수 있었다. 

과거의 살수, 사람의 목을 꽃을 꺽듯 베고 다니면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의 몸을 빼앗고도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이후 평범한 하인으로 살면서 도움을 주고 받고 신뢰관계를 만들고, 사랑을 하게 되면서 점점 이타심을 갖게 되고 망설이게 되고 결국 사람을 살리는 선택을 한다. 개과천선을 했어도 과거의 무거운 죄에 대한 댓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그 살수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생겼다. 정말 혹독한 대가... 악의로 결합된 저주스런 관계는 새출발하려는 그녀를 부여잡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게 만든다. 그 와중에 자신이 죽게 만들었던 딸의 손에 죽는 아버지는 죄값을 치른다. 

지금 우리와 달리, 환혼에는 어설픈 용서도 없고, 스스로 용서하고 용서받은 영웅도 없다. 적어도 이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문적인 법기술로 죄를 마사지하고 죄인을 조작한다면 다음의 더 큰 죄로 이어질 것이고 피해자는 사적 복수에 사로잡히게 될 수 밖에 없다. 

비열하고 천박한 정쟁에 대한 표현도 현실적이었다. 판타지지만, 부패한 정치가가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약자에게 뒤집어 씌우는지, 판세를 역전해서 권력을 이어가는지, 욕망을 미끼로 연합하는 참 찌질한 정치권력자들을 잘 보여주었다. 그 과정이 너무 답답하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 악에 동조하는 현상이 현실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말...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란 박진의 대사는  최고 권력자가 바뀐 이후 희생되고 조롱당하는 시민들의 한숨과 같았다. 

오래전 드라마 홍자매의 '쾌도 홍길동'을 가장 좋아한다. 홍길동이 벼슬을 받지도 않고, 율도국 왕이 되지도 않고 혁명가로, 반역자로 죽어간 이야기였다. 죽음으로써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정신을 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환상의 커플처럼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 이후로 말랑한 로코물만 써오며 기본 흥행수준을 유지하던 홍자매 작가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 또는 인간 삶, 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며칠전 이 영화를 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몰입과 충격 탓에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앉아 있었다. 영화 제작이 결정되고 준비하고 제작하는 시간을 생각해봐도 지금 현실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한데, 바로 지금 기가 막힌 현실에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쓴 노무현 대통령 추도사가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 제대로 읽어 보았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때 깨어있는 시민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 중에)

기억에 남는 대사와 장면이 많은데, 소현세자를 독살하는 장면을 경수가 알게 되는 그 씬에 너무 충격을 받기는 했다. 영화적 재미로도 의미가  있기는 했지만, 더 큰 울림은  보이지 않아 나름대로 어떤 상황이라고 추측하고 그것에 한줌 의심도 갖지 않은 경수가 현실의 참혹함을 외면하는 우리와 닮았다는 점이었다. 비로서 눈을 떠서 자각한 잔인한 현실에 다시 눈감고 못 보았다 할 것인가란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경수)

경수의 말처럼 소경이 아니어도 권력자들은 미천한 사람들이 아는 것과 그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간신히 용기를 낸 외침도 정쟁과 부조리로 무시되기 일쑤이다. 이런 일들은 구체적인 일상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정치는 멀리 있어서 눈감고 사는게 양심에 걸리지도 않는다.  삶에서 겪는 부조리와 고통은 내탓이거나 주위 사람들의 잘못일 뿐... 그렇게 생각하도록 훈련된다. 그래서 보지 말고 알려고 하지 말라고 유혹받고 강요당하지만, 잠시만 편할 뿐 더한 고통으로 이끌릴 뿐이다. 그래서 보아야 하고, 내가 보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올곧게 보고 사셔서 아프신 겁니다'(경수)

'안 보고 사는게 몸에 좋다하여 눈 감고 살면 되겠는가? 그럴수록 더 크게 뜨고 보아야지' (소현세자)

피지배자인 미천한 자에게도 눈을 크게 뜨고 제대로 보라고 말하고, 오자를 제대로 고쳐서 소통하라며 돋보기는 주는 장면은 따뜻하기도 했고, 지도자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그러므로, 인조같은, 더 악질적인 사람에게 투표하였다 하여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어 실수했지만 자기 혐오에 빠져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소경이면 소경답게 눈 감고 살아라'(인조)

그래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곧바로 반발하고 서로에게 이런 말을 하며 자조하지 않아야 겠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고 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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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이태원에 갔다. 10.29. 사고 직후 서울시청 광장에 분향소에 가서 그 형시적인 공간에 상처받은 이후 이름과 얼굴이 있는 제대로된 위패가 놓이기를 바랬다. 사고가 난지 49일이 지나 이태원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다시 조문을 했다. 이름과 사진이 놓인 그 자리에 지인들이, 또는 모르는 이들이 놓고 간 메모들이 있었다. 이태원역으로 올라가지 49재를 맞아 시민추모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미 여러번 이야기되고 나눠야 할 말들이 이제서야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 예상했던 가족들의 이야기였다. 나의 동생은 어떤 아이였고 어떤 추억이 있었고 하는 일은 무엇이고 앞으로 하고 싶은 그것이었다.. 내가 내 아들을 한국에 다녀오라고 한 게 잘못한 일인가?  이 나라는 내 아이가 어디에서 언제 죽었는지, 왜 그 병원에 누워 있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 이야기들을 나눌 사람도 없었고, 감시했다. 

10.29. 참사 49재 시민추모

너무 슬퍼서 그들처럼 눈물이 흘렀다. 잠깐만 들여다 보고 가려 했는데, 도저히 한 발걸음도 뗄 수 없었다. 한시간 넘게 서 있으니 발이 얼어 붙어 걸었다. 길을 건너니 해밀턴 호텔 옆 좁은 골목으로 갈 수 있었다. 그냥 시작과 끝이 그리 멀지 않은 좁은 골목이었다. 그냥 금새 지나갈 수 있는 그 길에서 많은 이들이 압사했다는게 이해가지 않았다. 바로 앞이 큰 도로이고 지하철 역인데, 우리는 백만명이 넘는 집회도 해보고, 몇개의 지하철역에서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쏟아내보기도 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이 길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게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모르는 나도 납득을 못하겠는데,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생명이 사라진 몸을 마주하고, 가족들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니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쳐버릴 것 같은 상태일 것이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는 일도 미칠 노릇이지만,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4.16. 합창단의 추모공연을 보면서 그들의 시간도 2014년 4월 16일에  멈춰 있음을 느꼈다. 잊으라 해도 잊을 수 없고, 회복되지 않은 그 상처는 그대로이고, 다시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도 피해자들에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정치는 있어야 할 그곳에 없고 피해자를 무시하고 경멸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줄까봐 대놓고 뻔뻔스럽게 모욕하고 스스로 지쳐서 자기혐오에 빠져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들과 설악산 대청봉을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작년에 혼자서 대청봉을 오르고 나서 나눈 이야기가 자신은 할 수 없다였으니까. 족저근막염으로 못한다 포기했는데, 등산스틱을 사용하게 되면서 통증이 사라졌다고 도전하게 되었다. 이러저런 장비를 사고 버스표를 예매했다 취소하며 결국 보라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 

새벽 3시 출발, 용산에 만나기로 했는데, 보라언니가 오지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고... 20분정도 지났나... 그녀는 자다가 전화를 받았다. 너무 놀라 정신없이 차를 가지고 나와서 출발했다. 토요일 새벽에 우린 출발했다. 6시가 조금 넘어 오색 도착, 김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한계령 휴게소로 이동해서 7시 정도에 출발했다. 그 시간에 출발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생각같아선 더 일찍 출발해야 했다. 

한계령 초입에서 나름 일출을 보았다. 이때 사진 찍는 태영이를 보며 더 멋진 풍경을 볼거라고 찍지 말라고 장담했다.

 

한계령 길은 오색 코스보다 더 힘들었다. 더 험하고 길고 멋진 경관을 보며 갈 수 있지만, 너덜길이 이어지고 사족보행을 해야 하는 길도 많았다. 5시간 걸린다는 중청을 태영이와 나는 6시간30분만에 도착했다. 천천히 여유있게 가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경관은 한계령을 기준으로 한쪽은 맑음, 한쪽은 구름이 자욱했다.

멋진 고사목

너무 아름다웠던 길이다. 파란 하늘, 늦가을에 마른 잎이 떨어진 돌길이 멋있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 긴 시간을 몰랐기에 더 기분이 좋았다. 

한편에선 이런 웅장한 모습이 너덜길을 위태롭게 걷는 힘겨움을 잊게 해주었다. 

중청으로 갈수록 파란 하늘은 없어지고 대청봉에 올라서도 구름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작년에 본 멋진 하늘과 산세, 속초시내와 동해바다까지 푸른 산과 하늘이 어우러지던 그 날은 얻어 걸린 날이었다. 

대청봉에 오르고, 대청봉을 보았다. 그때가 2시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구름속 습기인지, 빗방울인지, 머리도 젖어가고 서둘러 내려왔다. 내리막길을 조심히 내려오다 보니 1시간에 1키로를 내려왔다. 오색이 5키로 이니, 이대로면 5시간이 걸리고 중간에 해가 진다. 걱정스러워 서두르기 시작했지만, 결국 5시가 넘으면서 어두워졌다. 랜턴을 켰지만, 오색의 내리막길은 너무 생각보다 위험했다. 작년에 오를때는 힘들었지만 위험하지는 않았다. 무시무시한 오르막 돌길은 내려갈때 보니 심하게 울퉁불퉁했고, 잘 보이지도 않았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태영이는 모르는 이들의 발끝에 불을 비춰주었다. 속도는 더 느려졌고 완전히 어두어져서야 내려왔다. 너무 비싼 랜턴을 샀다고 뭐라 했었는데 그 대단한 밝은 빛으로 타인의 발끝을 비춰주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다리도 발도 너무 아팠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고... 9시간 걸린다는 그 길을 우리는 12시간 걸렸다. 그래도 다행이고 덜 힘들었다. 아마도 함께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이날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2022년 10월 29일... 나와 친구들이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고 온 날에 이태원 할로윈 축제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믿을 수 없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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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뒷산을 걸었다. 비교적 짧은 등산코스여도 가파른 경사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아무 생각없이 오르다 문득 내려갈까 하는 유혹이 일어난다. 그 순간을 참고 생각없이 걷다 보면 능선에 오르고, 다시 오르고 내려가고를 반복한다. 그러다 문득  힘들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힘이 없는 것 같았는데 몸 안에서 힘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2022년 9월 백운대를 바라보는

여러번 같은 길을 걸으며 이 자리에서 백운대를 바라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아래 연보라 쑥부쟁이 꽃이 잔뜩 피었다. 그날 산능선에는 쑥부쟁이가 신나게 피어있었다.

쑥부쟁이들

뜨거운 햇빛에도 산능성은 시원했고 계곡물소리는 경쾌했다. 두 다리가 힘들게 고된 땀을 흘려야만 시원한 바람소리, 물소리를 느낄 수 있다. 항상, 변함없이 그렇다. 기억에 남는 흔하지 않은 아름다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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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늘 그림은 앞으로 그릴 그림의 습작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비슷한 그림이 많았던 것이다. 아이들, 사람들, 닭, 소, 물고기, 게... 사람과 동물, 자연의 아름다움의 경계가 확 넓어진 느낌이다. 지금 다시 보니 그의 그림은 선과 선들이 만든 면이 중요해 보인다. 선과 면만으로도 충분히 역동적이고 따뜻하며 그립다. 

은지화

처음에는 담배갑 내지에 그림을 그린게  종이나,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라고만 여겼다. 작은 휴지쪼가리 그림은 하찮게만 보였다. 로봇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는 처한 조건에서 할 수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렸던 것이다. 어디서나 무엇으로든 그리고 또 그렸다. 황재형 화가가 처음에는 물감이 살 돈이 없어서 물감에 흙을 섞어 그린 것과 같다. 결국 그것이 그 자신이 표식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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