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기념사업회에서  "돌봄과 놀이를 통한 민주주의 소통 워크숍:민주주의, 몸과 마음을 돌보다"를 신청했다. 아직 강사양성과정도 끝나지 않았는데, 비록 하루지만 약간의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제목에서 "놀이"가 핵심단어로 보였다. 즉, 주로 온종일 몸을 쓸 거 같다는 것이었다. 진행을 하는 변화의 월담은 몸을 도구화하는 문화를 넘어 몸의 목소리와 활력을 회복하는 바디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하는 스타트업 기업이다. 활동가 단체같기도 하고,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교사연수, 각종 교육, 자체 교육을 이미 많이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발을 만지는 것에서 시작했다. 꼭 쥐어보고, 벌려보고, 주무르게 했다. 발 뒤꿈치에 무게를 60을 두고, 발 앞부분에 30, 발가락에 10을 두는 느낌으로 서보고, 한편 다리에 무게를 싣고 다른 한편 다리를 위와 아래, 둥그렇게 돌려 움직였다. 젠가를 발뒤꿈지에 쌓아가 변하나는 무게를 느껴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짝을 정해 작은 공을 주고 받는데, 던지는 거리와 방향을 달리 하고 상대에게 신호를 주고 상대는 그에 반응한다. 그러다 공의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짝이 바뀌는 식이다. 

순서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파트너가 끈이 달린 작은 공을 위, 아래  또는 좌우, 원형으로 돌리면 빈 공간에 자신의 움직임을 채워 넣는 것이다. 팔을 밀어 넣기도 하고, 몸통을 넣다 빼기도 하고, 옆으로 비켜 나가기도 한다. 강사들은 몸이 움직이는 형태가 곡선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딱딱한 나무 토막같이 움직임과 움직임이 딱딱하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렸다.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는 강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오후부터는 허리가 너무 아팠다. 디스크였다. 허리를 부여잡고도 계속 움직였다. 희안한게 별 말을 하지 않는데도 파트너와 소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 동네 공터와 골목을 뛰어 다니며 친구들과 얼음땡, 숨박꼭질을 하던 기억이 났다. 땀을 뻘뻘흘리면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며 신나게 웃고 떠들던 기억이다. 요즘은 몸으로 노는 일이 거의 없고, 주로 입으로 떠들고 입으로 먹고 마신다. 어렴풋이 사슬이 느슨해진 느낌, 작은 틈이 벌어진 것 같았다.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것에 예민하고 조심하다 보니, 몸으로 표현하는 좋은 감정 표현, 호의도 낯설어졌다. 일로 만난 사이, 위계가 있는 사이는 거리가 있다. 거리를 좁히는 것도 일방의 생각대로 하면 안되다 보니 더 섬세하게 접근하고 배려하기보다는 그냥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한 방법을 선택한다. 놀이로 소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운동을 안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활동이 수십년만이었다. 엉덩이 쪽이 뭉치고 눈이 감길 정도로 노곤했다. 이런 피로는 정말 생소하다. 다음날 일요일도 온종일 정신을 못차렸다.  이런 활동을 여러번 배워보고도 싶고 정기적으로 이렇게 놀면 긴장과 긴장으로 인한 관계에서 불편함, 예민함이 줄 것도 같다. 

 

 

아주 가끔 빛이 나는 사람을 볼때가 있다. 자신이 해온 일, 하고 있는 일을 아끼고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일이 돈을 많이 벌거나  사람들이 인정하는 전문직인가하고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높은 기준을 자신이 정하고 몰입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다.

메일면을 좋아해서 잘한다는 냉면집이나 막국수집을 가끔 찾아가기도 하지만 소바는 좋아하지 않았다. 면은 그냥저냥 맛이 없었고, 쯔유는 많이 달았다. 구수한 면, 시원한 동치미나 진한 고기육수가 아닌 그냥 분식집 음식을 굳이 찾아 먹지 않았다. 

한메순(한반도메밀순례단)에서 소바마에를 7월에 가기로 하고, 궁금해서 6월에 현정씨와 미리 가봤다. 성수동에 있는 작은 가게이다. 약간 지하라고 볼 수 있는, 반지하였다. 과거 성수동에 많았던 작은 공장 자리였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찌꼬바라 불리던 땅 아래 공장이었다. 쇳소리와 땀내로 가득찼던 거리는 가장 힙하고 비싼 땅과 건물이 되었다. 비싼 아파트가 들어서고 힙한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인간의 삶은 사라진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그렇게 작게 자리잡은 소바마에는 유명세에 비하면,  요즘 식당물가가 너무 올라서 값어치만 한다면 과한 가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기본형, 자루소바를 먹었고 현정씨는 니씽소바를 선택했다. 면이 부드럽고 뚝뚝 끊긴다. 씹을 수록 구수하고 향이 느껴졌다. 좀 비싼 빵집에서 막 만든 거친 통밀빵을 씹을 때 기분좋은 느낌과 같았다. 쯔유는 지금까지 경험한 쯔유와 달랐다. 약간 달고, 짜고, 시고, 쌉쌀했다. 면만 먹어도 만족스러웠고 쯔유에 찍어 먹어도 좋았다. 그리고 추가로 시킨 온천계란과 새우튀김도 맛있었다. 음식의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메순 공식 방문은 7월 13일 늦은 저녁이었다. 정말 비가 쏟아지는 목요일 저녁이었다. 이 모임을 이끌고, 메밀에 누구보다 진심인 박승흡 단장님과 함께여서 지난번 그냥 손님일 때와 달리 김철주 사장님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번엔 공통으로 자루소바를 2개 주문하고 각자 원하는 소바를 주문했다. 니씽소바,  토로로소바, 카케소바, 에비텐소바, 온천계란등을 주문했다. 나는 따뜻한 에비텐 소바를 주문했다. 기본 가케소바에 새우튀김을 따로 내왔다. 온소바는 면이 쉽게 풀어지니 빨리 먹으라고 해지만 다른 소바와 나누어 먹느라 천천히 먹었다. 나중에는 젓가락으로 잡히지 않아서 그냥 후루룩 마실 정도였다. 설명을 듣고 나니 면과 쯔유의 맛이 더 풍성하게 느껴졌다. 박승흡 단장님의 오미가 다 들어있다라는 설명이 정말 맞아서  놀라웠다. 

자루소바
니싱소바,, 국물소바는 가케소바 기본에 추가하는 방식이다. 청어, 새우, 소고기등
온천계란,  낮은 온도에 익혀서 냉장보관해서 내준다. 그냥도 맛있고 같이 주는 시치미를 뿌리면 다른 맛으로 변한다.

 

튀김, 나는 새우튀김이 정말 맛있다.
우메보시, 처음 경험한 매실이다.

사장이나 쉐프인 김철주님은 일본에서 직장인으로 사업가로 살다 은퇴를 하고 코로나가 시작되던 해에 성수동에 가게를 열었다. 일본에 살면서 소바를 너무 좋아하다 찾아다니며 즐기다가 배우게 되었다. 일본은 지역마다 소바가 다르고 공방처럼 사람들이 모여서 배우고 만든다고 한다. 김철주님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고 은퇴후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던 중 좋아하는 소바를 일로 하게 되었다. 삼비탕은 방송에서 만든 것이고,  손반죽도 하지만 기계반죽을 한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해서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너무 맛있고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도 자신은 아마추어일뿐이라고 하며 몸을 낮추었다.  자긍심은 솔직함, 겸손함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진심으로 노력한 일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행복해보였고 자긍심도 느껴졌다.  맛이 좋다는 것은 감각만이 아니라, 어쩌면 좋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까지 담아낸 그 어떤 것이 아닐까 한다. 

그날의 기억을 정리하면서 새삼,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운이기도 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내려놓을 정도로 스스로 지혜로워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극은 프로이드가 생의 마지막,  C.S.루이스와 대담이다. 물론 가상이다. 이 루이스가 오래전 본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인지 긴가민가 했는데,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나니아 연대기 3부작,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새벽출정호의 항해', '캐스피언왕자' 영화를 나름 재미있게 봤었다. 마법, 동화, 판타지를 좋아하는 취향 탓에 재미있기도 했지만, 백인중심의 기독교 윤리는 계속 불편했다. 이는 루이스의 친구인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죄에 대한 강박, 절대자로서 구원자, 선을 상징하는 백인을 제외한 이방인에 대한 악마적 묘사는 너무 불쾌했다.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원죄와 신을 향한 목적이 있는 인간이 아닌, 그저 존재하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만인 아니라,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인정할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많은 부분 좌우된다. 그런 인간들의 삶은 신으로도, 무의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2차대전 중 독일의 영국 런던 공습을 앞둔 상황이다. 말도 안되는 이 전쟁은 이성의 산물인가, 또는 무의식의 결정인가, 아니면 신의 의지인가란 질문이기도 한다. 전쟁과 같은 큰 결정이나,  개인의 삶에서 소소한 선택까지 인간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결과에 대해 이렇게 질문한다.  
프로이드와 루이스는 각자의 삶에서 어떤 요인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토론한다. 이러니까 신이 있다는 거지요, 유신론자인 당신의 무의식에 숨겨진 욕망 아닌가... 이런 식이다. 진지한 이야기인데, 깊이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신이 존재하는가란  토론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나오지 않을까? 모든 것이 원만한 상황에서는 딱히 신의 존재를 고민할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연극은 뭐랄까,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비극은 토론주제와 직접 관련될텐데, 그저 배경음악 정도로 소비했다. 그러니 이 질문이 피상적으로 느껴지고 그다지 열정적 토론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연극무대는 멋있었고, 신구배우의 연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이상윤배우의 연기가 다소 평면적으로 보인건 연출의 문제인지, 배우의 해석문제인지 모르겠다. 다른 해석이 가능한지, 다른 캐스팅으로 보고 싶다.

그냥 오랫동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 하지만 따지고 들면 그 원인이나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추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제주 4.3. 도 그렇다. 국가가 조직적으로 빨갱이를 잡아들인다고 일반인들까지 제주민 3만여 명이 죽었다는 사건으로 알고 있었다. 오래전 알던 제주 출신 친구도 그의 삼촌 중 하나가 그렇게 죽었다고 했다. 내가 제주를 처음 갔던 20대 후반에도 제주 바다는 너무 아름다워서 과거의 비극은 멀고 추상적이기만 했다.  그렇게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2018년으로 기억한다. 4월초 제주여행을 왔다가 마침 4.3. 기념식을 해서 참석했다. 마침 문재인대통령이 참석해서 정말 사람이 많았다. 차가 너무 막혀 평화공원 멀리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야 했고, 멀리서 행사를 볼 수 있었다. 인상에 남는 한 장면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큰 벽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서럽게 흐느끼는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4.3. 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임을 알게 된 때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 프로그램중에 4.3. 다크투어가 한나절 잡혀 있어서 북촌마을 너븐숭이기념관에 가게 되었다. 자료를 보고 정리한 4.3.의 맥락은 이렇다. 해방 이후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일제부역자들이 여전히 국가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미군정이 통치에 그들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민중의 기대를 배신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그  시대에 미국과 이승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해방 후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을 가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각자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를 하고 분단 정부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 정치활동은 제주도 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민들의 자발적 조직인 인민위원회는 전국에 만들어졌는데,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가장 오래 존속되었고,  이는 자영농 비중이 높아서 관계가 더 평등한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을 피해 일본으로 많이 도망갔고, 거기서 교육을 받으며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꽤 됐다고 한다.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긴장이 높아지고 1947.3.1. 제주시  기념대회 때 시위대에 민군정 경찰이 발포해서 민간 민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정에 책임을 묻는 제주도민의 총파업이 시작되어 학생은 학교를 가지 않고 공무원과 교사는 출근하지 않고 시장과 가게는 문을 닫았다. 강제진압방침을 세운 미군정은 이들을 잡아들이고 서북청년단을 들어오게 하여 테러와 약탈을 일삼게 만들었다. 이는 반발과 분노가 쌓여 1948.4.3.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4.3.은 1947.3.1.부터  1954.9.21.한라산 금족령 해제된 시기까지로 본다.

북촌마을 학살은 1949.1.17. 단 하루동안 마을주민 400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근처를 지나가던 국군을 무장대가 공격해 2명이 사망하자 국군은 인근 북촌마을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 아이들, 갓난아기, 노인 가리지 않고 총살을 한 사건이다. 당시 생존자인 고완순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날의 오후 태양과 고인 핏물이 만져진 느낌을 70년이 지난 지금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 죽인 옴팡밧에 지금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이후 4.3.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타지에 나가 살다가 나이가 들어 돌아오고서도 한참이 지나서 4.3.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행방불명된 외삼촌, 크게 울어 시끄럽다고 국군 곤봉에 머리를 맞아 죽은 동생... 고완순님은 당시 9살이었고 그가 딱히 원하는 것도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의 동생도 아기였고, 동네 머슴의 아내였던 만삭의 임산부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교전상태도 아니고 적진도 아니고 무방비 상태인 민간인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북촌마을 옴팡밧 학살터,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다. 쓰러지 주검처럼 소설 속 내용을 쓰러진 비석에 새겨 넣었다.
목시물굴 입구, 다른 편에 이보다 훨씬 작은 구멍이 있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산짐승이 파 놓은 작은 구멍정도. 탐방간 이들 중 몇명은 가이드를 따라 들어갔다. 불꺼진 동굴 안에서 두려움보다 안전한 느낌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날의 사람들도 그랬을까?

살기 위해 산속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숨어있던 목시물굴에 가봤다. 입구가 너무 좁아 들어가는 걸 포기했다. 이 굴도 국군이 주민들을 고문해서 찾아내고 숨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자신의 이념적 선택도 있지만, 무차별적 학살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중에도 투항하는 적들을 살려주지 않나 

우리는 2차대전 중 벌어진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알고 있다. 국가 관료체계에 의해 조직으로 자행된 그 집단 학살이 범죄행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나아렌트는 이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란 유명한 표현을 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 '악'은 특별한 악당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속에도 있다라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아렌트는 멍청함이라고 설명했다. 자기한테 주어진 일을 고민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무능함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그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히만과 달리 나치의 집단 학살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사직을 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사형을 당하기도했다. 

비슷하게 제주 4.3.의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3.1.절 기념식 발포와 총파업에서 박경훈 제주도지사는 항의성 사직서를 내며 희생된 인민에게 조의를 표하였다. 4.3. 봉기 이후 제주주둔군 9연대 김익렬 중령은 평화협상을 이끌어 점진적 무장해제와 무장대 신변보장을 합의하였으나 미군정의 방해공작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후임운 일본군 소위 출신 박진경 중령이었다. 그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모두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말한 사람이다. 지배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임무이고 그들이 시키는 일은 다 정의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후 강경토벌이 진행되고, 몇 달 뒤 대령으로 승진하여 이를 축하는 파티를 한 날 박진경은 결국 부하들에 의해 암살된다. 상사를 암살한 문상길 중위는  처형당하면서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전범들은 줄줄이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거나 형을 살았다. 당시 나치들은  남미 아르헨티나로 많이 도망갔고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 잡혀와 재판을 받고 처형당해 바다에 뿌려졌다. 전후 일본의 전범들도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권선징악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국군이 전쟁시기도 아니고 교전상태가 아님에도,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그 과정과 책임자를 밝히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다. 아이히만은 재판장에서 자신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시키는 일을 한 것, 그 과정 중 일부를 담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는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심문과정에서 따귀를 한대 때린 기억에 큰 양침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수용소로 유대인을 적시에 더 많이 실어나를 창의적인 발상을 한 것은 단지 열심히 일한 것 뿐이었다. 살인과정의 일부를 담당한 현장 책임자가 있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승인한 진짜 책임자가 있다. 진짜는 살인을 한 적이 없을 것이다. 현장책임자도 지시를 하고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책임자가  아닐 수 없고 합법적인 지휘명령체계에 따른 명령을 수행했다고 해서 살인이 아닐 수 없다. 법적절차를 거치지 않은 국가살인을 목숨을 걸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라는 불의는 앞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국가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여러 이념과 이상이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게 경쟁하던 시대에 우세한 권력에 반대한 사람들이 투쟁을 하고 패배해가던 그 시대에 저편에 있었던 사람들을 지금은 우리의 과거가 아닌가.  수년동안 진행된 토벌 결과 희생자는 14,533명,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5천 명에서 3만 명이라고 한다. 지금도 북한 김일성의 사주로 발생한 폭동이라며 희생자의 순결함을 평가한다. 빨갱이 몰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북촌마을 위령비 상단에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새겨져 있을 정도이다.  다른 세상을 꿈꾼 사회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단독정권수립과 매국정권에 반대한 민족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반발하거나 도망갔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이유가 그 비극의 희생자가 되지 못할  단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들 모두가 우리의 과거이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호암미술관을 가보고 미술관을 둘러싼 자연환경이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고 열리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특히 호암미술관 정원은 산책하기 너무 좋고 일본정원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작위적이지 않아서 더 편안했다. 그리고 작은 연못과 초입에 있던 큰 호수도 분위기 있다. 그렇게 산책하다 다시 작품을 관람할 수 있어서 내외부 공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작품관람시간도, 횟수도, 공간도 보는 사람이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다. 대체로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표값을 다했다고 재입장할 수 없는 것과 비교하면 유연하게 인간 친화적인 셈이다. 

내셔널갤러리 작품을 본 국립중앙박물관도 주변 공원과 호수가 멋있었고, 올림픽공원내 소마도 그렇다. 여러번 왔었는데도 크고 멋진 호수를 처음 봤다. 다만 미술관 자체는 너무 좁아서 사람이 많이 모일만한 전시를 다시 하려면 고민이 될 것 같다. 이번 전시가 너무 큰 기획이어서 일 수도 있지만,  이 멋진 기획을 더 큰 공간에서 했다면 기획자들이 더 신이 났을 것도 같다. 

경기도 미술관도 화랑유원지내에 있다. 아주 화랑호수와 공원을 가지고 있고, 한편이 유리벽이어서 숲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다.  다른 폐쇄된 전시관과 비교하면 개방감이 들었지만 어떤 작품은 그런 외부환경과 프레임이 배경이 되고 작품을 분할해서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술관이 공원내에 자라잡고 있고 그 옆에 물이 흐르고 있어서 다가가기에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전시를 보고 나서는 물을 바라보며 복기해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없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를 한참 듣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참 좋았다. 그래서 그 전시를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호암미술관, 새소리가 나는 평화로운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빗방울이 흩뿌리던 박물관 앞 호수에 왜가리는 한참을 물속을 노려봤다
올림픽공원 내 호수, 몽촌토성 해자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름 저녁 6시 물이 마치 거울처럼 풀과 나무를 비추고 있었다.
경기도미술관 화랑호수, 넓고 황량한 느낌이다. 호수 주변 풍경이 자연스럽지 않고 들쭉 날쭉하다

경기도미술관에서 하는 한국근현대미술전 티켓이 한장 남아 오늘 다녀 올 수 있었다. 가보니 노쇼가 꽤 있는지 현장입장도 무리가 없었다.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기에 편했다. 최근에 다녀온 소마의 근현대미술전 작가들과 많이 겹치지만, 작품들은 겹치지 않았다. 잘 몰라서 일수도 있지만, 전시회 주제를 "사계"로 한 이유는 내가 이해한 바로는 비발디의 사계처럼 한국근현대 역사의 특성, 엄청난 변화의 흐름에서 예술가로 큰 변화를 받아들여 그 영향을 받고 시간이 흘러 한국미술의 고전이 되었다는 점, 작품들에 내재된 자연, 계절감, 시간성을 '조화', '자연', '향수', '순환'등 추상개념으로 확장해서 분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제의식과 분류는 거의 이해가지 않는다.  이해가 어려워 유튜브에 게시된 해설영상을 보았지만 마찬가지이다. 그 작가가 어느 학교를 들어가 누구에게 사사받았는지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서사는 어떠했고 누구와 관계하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중요하지 않나... 소마에서 하고 있는 근현대전이 분류한 시대적 변화와 작가 개인들의 처지와 사유를 연계하고 작가의 메모와 편지, 저서등을 이용해 설명력을 높힌 점과 비교되었다. 예를 들어 디아스포라 에 월북화가작품을 분류하여 그들의 서사를 같이 보여주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감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다른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의미있었다. 또 큰 화랑호수를 같이 본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강촌추색(1960), 변관식

현대미술관 전시회에서 보았던 것 같다. 조선시대 산수화 같은으면서도 집들, 사람, 나무가 뭔가 다르고 비탈길을 올라가는 남자도 뭔가힘겨워 보이고  웃기다. 보면 웃음이 나고 다시 봐서 반가운 그림이다. 

까치(1987), 장욱진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장욱진의 그림, 평범한 사람이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전혀 짐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림이다. 

수묵투우도(1984), 박생광

에너지가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힘있는 그림, 구상화인데 추상적인 느낌도 나고 수묵화라 그런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소마에서 본 그의 그림은 불화나 무속적인 것 같고 색이 너무 선명한 원색이라 무섭기도 했는데, 이 그림은 싸우는 장면인데도 느낌이 다르다. 

항국(1960), 이쾌대

사전 소개 영상에서 보았던 그림, 이쾌대 작가가 북한에서 그린 그림인데, 어떻게 국외에 흘러나와 이건희일가가 소장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이 궁금하다. 월북 전에는 사람과 시대가 표현된 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서정적이다. 어떤 해설자는 사람이나 사회를 그리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하던데, 알수 없는 일이고 다만 사람과 시대가 없는 이 그림은 말랑하지만  쓸쓸하다.

여수항풍경(1978), 오지호

바다색이 깊고 시원해서 좋았던 그림이다. 배는 드나들고 있고, 바닷일을 하는 사람과 일을 시작할 수도, 마쳤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5명이 보인다. 

황파(2002), 강요배

강요배는 제주도에서 제주의 풍광, 4.3.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전에 들어봣을 수는 있지만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지나가며 보다 너무 멋있고 웅장해서 찬찬히 보았다. 거친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고 비처럼 뿌리고 흩어지는게 너무 실감난다. 제목이 황파이니, 비가 많이 오는 여름 장마가 아닐까? 깨져나가는 파도는 도전하고 저항하는 민중일수도, 비극적 사건일수도 있다. 해석은 각자... 이 그림은 좀 떨어져 봐야 선명하게 보인다. 시간의  거리처럼,  시간이  많이  지나 멀어진 4.3.도  선명하게  보일 터이다.

다녀온지 10일이 넘었지만, 배운성 화가에 대해서는 꼭 글을 쓰고 싶었다. 다른 월북 화가들처럼 민주화이전까지 언급조차 되지 못했던 사실도 그렇고, 그를 기억할 친인척도 없었는지 국내에서는 흔적조차 없었던 듯하다. 1997~8년 우연히 프랑스 유학생이 골동품가게에서 발견한 그의 그림 수십점...극적이고  운명적 만남이란 이런 일이다. 
카페같은 홀에 있는 유럽인들 속에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자신을 그려 넣은 그림은 기이하고 이질적이다. 이 기이함은 유럽속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존재, 조선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표현했기 때문인듯 하다. 이미 생긴 것만으로도 다른데, 굳이 갓과 한복을 입혀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1920년대 유럽에서 공부하고 전시회도 하던 이름있는 화가였음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 빼앗겨 이름없는 나라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었던 것일까? 

이 그림도 기이하다. 가족도라고 하지만, 각자 혼자 있는 느낌이고 서로를 신경쓰는 것 같지도 않다. 마치 작가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죄다 모아 놓은 것도 같다.  과거에 이러저런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후원자였던 백인기 부부, 또는 할머니, 어머니, 동생, 조카들의 모습, 좋아했던 개의 모습이었을지도...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시간대에서 관계했던 사람들, 자신의 삶을 기록한 것 같다. 
그가 그려넣은 자신의 얼굴은 이 그림들이나, 다른 그림들에서도 살짝 미소를 띠고 있다. 장난스럽게도 보인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나  급변하는 시대가 힘들만도  한데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것 같다.
가난하고 나라도 없던 시절, 부잣집의 서생으로 후원을 받아 일본유학을 가고, 다시 유럽으로 유학가 미술을 공부하고 거기서 인정받아 성공했고, 2차대전으로 귀국하여 일제에 부역하고 6.25 이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했다. 유럽에서 한국, 남한과 북한으로 공간적 거리와 일제강점기에서 6.25을 지나 분단까지의 시간적 거리를 종횡무진한 작가의 삶이 애닮은 듯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먼  시간과  공간의  이질성이 기록된  한장의  사진같다.

예전 어느 전시회여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이었던 것 같다. 월북작가 전시회였던가, 아님 민중미술전시였던가 가물가물하다.

이쾌대라는 독특하고 직관적인 작가의 그림이었다. 이 자화상 같은데, 참 독특하다란 생각을 하고 지나쳤다. 이번 전시회에서 도슨트를 들으며 다시 보니 그의 이야기에 좀 더 깊게 닿았다.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하고,  또는 아픈 어머니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해 어쩔수 없이  김일성초상화를 그리는 등 북한에 부역해서 거제포로수용소에 끌려가고 이후 포로교환때 어쩔수 없이, 금새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고 북을 선택했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깊이 사랑했던 그가 가족을 걱정하고 그리워했던 편지가 참 슬펐다. 너무나 강력한 역사속에서 개인의 의지와 선택은 참 제한되는 것 같다. 

"아껴둔 나의 채색등은 처분할 수 있는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우리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예전에 몰랐는데 설명을 들으니 서양식 페도라, 파레트에 조선의 두루마기와 붓, 조선의 산과 마을이다. 자신이 어느 시간과 공간에 있는지 명쾌하게 표현했다.

군중

우리나라에도 이런 그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딱 떠오른 것은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이었다. 민중을 이끄는... 이 그림은 같은 화면, 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놓인 시간대는 달라 보인다. 해방을 전하는 사람들, 전쟁에 죽어간 사람과 그들의 가족,불안한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다른 해설을 들으니 "군중"이란 제목의 그림은 4 연작이다. 

월북작가가 되어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을 거론조차 못했다. 그가 사랑하던 부인 유갑봉은 그의 그림과 재료를 팔라는 편지를 거부하고 그의 작품을 모두 보관했다고 한다. 정부의 감시 때문에 꼭꼭  숨겼다. 세상에 나왔을때 모두 파괴될 수도 있었기에 언젠가 위대한 예술가로 복권되는 그 날을 기다린 것이다. 그의 아들도 미술을 전공해 아버지의 그림을 보수하면서 지켜내었다 그들의 바람과 의지로 역사의 폭력을 넘어 이쾌대가 현재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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