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데기로 동급생의 생살을 지지면서, 그의 비명을 들으며 히히덕거리는 아이들은 악마의 모습이었다. 멸시하고 학대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 가진 모습 중 하나임을 알지만, 사회는 가학적 욕망을 통제하고 비교적 건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편들도 발전시켜 왔다. 가학적 욕망이 통제되지 않고 여러 부정적 성격들과 환경들이 결합되었을때,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도 권력과 뇌물로 무마시켰을때 학폭 같은 것들, 여러 갑질들이 재발되고 확산되어 버린다. 돈이 경제생활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나 사법 영역으로, 교육의 영역으로 흘러 갔을때 이런 꼴이 나고 만다.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아이가 동료로부터 학대를 받고도 구조받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린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 때문에 죽으려고 할때, 그를 살린 건 복수였다. 복수는 삶의 목적이 되어, 공부도 대학도 교사도 남자도 오직 복수과정에 종속되어 버렸다. 와신상담이란 고사가 떠올랐다. 인간관계가 주는 위로와 즐거움으로 복수를 잊을까 장작더미에서 자고 쓸개를 씹는 자기학대로 그녀는 인간들의 유혹을 이겨나간다. 오직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 그 이유로 살아가는 것이 납득되었다. 복수할 이유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살아가지 못했다. 구원받지 못했던 삶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었다.
유튜브에서 잠시 본 참 끔찍한 단편영화가 생각난다. 어떤 사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제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살인자는 피해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되어 간다. 그 과정은 사지를 하나씩 자르고, 그 다음에는 눈을 뽑고, 장기를 하나씩 적출해 간다. 치료를 하면서 회복되면 하나씩 신체를 파괴해가는 것이다. 처음 큰 소리를 치던 살인범은 점차 눈에 초점을 잃고 두려움에 떨며 다음의 파괴를 기다린다. 한번에 죽이는 것보다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와 절망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이다. 두려운 시간을 길게 겪게 하면서 벌하는 것인데,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참담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도 똑같이 황폐하게 변해갔다. 분노로 가득찬 이들은 가해자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도 초점을 잃고 망가져 갔다.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바뀌었다.
피해자 문동은은 살기 위해, 살아가야 할 이유로 복수를 정하고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갔다. 그녀가 가해자가 되는 날 복수는 완성될 것이다. 어른이, 교사가, 학교가, 사회가 고통받는 개인을 구원하지 않을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꿈꿀 수 밖에 없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매일 그 상처를 긁으며 복수하는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복수를 하는 그녀는 순간 순간 행복을 느끼나 행복한 가해자들에 비해 황폐하고 왜소하다. 항상 싸구려 김밥을 먹으며 마른 장작처럼, 칼날위에서 쉬는 것처럼 날카롭고 메말라 있다. 허깨비 처럼, 복수심에 영혼과 몸을 내어준 것도 같다.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지켜야 할 때 허깨비에 피가 돌고 영혼이 돌아와서 사람이 될 것이다. 복수가 끝이 났을때, 그녀가 피와 살이,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으면 한다. 그래야 복수를 하고도 행복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 모습은 어린 예솔이를 지키는 것이나, 가정폭력 희생자인 강현남과 그의 딸을 보호하는 것, 주여정을 살리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해자들과 다른 선택을 해야 그녀가 파괴되지 않고 복수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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