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 4월25일, 피레네를 넘어
사실 피레네하면 엄청나게 높은 느낌이 들지만, 우리나라 산과 비교하면 전혀 험하지 않다.
포장도로를 걸어가고 경사도 완만하니, 다만 내려가는 길이 급경사이기는 하지만, 가끔이라도
등산을 한 한국사람이라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람이었다.
4월25일 아침, 새벽 1시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6시정도에 일어나 짐을 챙긴다. 첫날이라
짐싸는게 역시 서투르다.
맛있는 아침을 먹고, 먹다 남은 과자까지 싸주시는 쥔장의 친절함에 잠시 감동하였다.
가방이 작고 무거운게 싫어 간식을 창우와 나누었다. 이는 몇시간만에 나에게 재앙이 되었다.
7시30분경 나를 포함한 한국인 5명이 함께 출발하였다. 남자들은 금새 앞질러 간다.
게다가 수진과 나는 1킬로는 다른 길로 가다 돌아왔다. 피레네를 오르는 오르막길에 들어서는데
벌써 어깨가 아파온다. 배낭은 천근만근. 내 배낭이 제일 작은데도 이렇다.
순식간에 모자가 날라갔다. 이때까지도 이야기하며 웃으며 걸었다.
바람이 점점 세진다. 바람에 맞서 걸을 수가 없다. 바람이 앞,뒤,좌,우에서 무차별 공격을 한다.
쓰러졌다. 한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앞에 외국여자를 보니 네발로 기어간다. 나도 네발로 긴다.
주저앉았다. 안경이 날라가는 걸 잡았다. 다른 게 다 날라가도 안경은 있어야 한다. 배낭 밖에 묶어둔
침낭도 날라간다. 다행히 몇발짝 가서 잡아채서 끌어 안았다. 무섭다. 덩치가 큰 여자가 뒤로 구른다.
바람에 밀려 중심을 잃은 거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이들이 있다. 자전거도 데려 가는데, 나도 가야지하고
그들 뒤에 붙어 갔다. 바람 좀 덜 맞을까하는 마음에서다.
몇초간 바람이 멈추면 몇발짝 가다, 멈추다를 반복하는데 이 길은 끝이 없다.
드디어 오리손 알베르게, 여기서 멈추고 싶다. 20분정도 있으니 수진이 온다. 커피를 마시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배낭을 꽁꽁 싸맸다. 또 아무 근거없이 이제는 바람이 불지 않을 거라 나름 생각한다.
수진과 다시 출발. 바람은 아까보다 더 세다. 그러나 바람에 버티는 요령도 세졌다. 좀 있으니 수진이
뒤쳐져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싸대기를 맞고, 등뒤에 떠밀고, 옆에서 쳐서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입술이 바싹 마른다. 목이 마르다. 그런데 오리손에서
물을 절반이나 버렸다. 수진이가 물이 많아서 같이 갈 생각에 그랬다. 간식도 바나나 한개만 남기고
다 먹었다. 수진이게 과자와 빵을 넘겨줬다. 내가 내 무덤을 팠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너무 무섭다. 무서워서 눈물이 난다. 이 길에서 죽을 것 같기고 하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되돌아 갈 수도 없고, 혼자라서 더 무섭다.
이런 바람은 생전 처음이다. 당연히 그렇다. 태풍이 오면 집 밖으로 안 나갔으니까...
길바닥에서 휘청이고 있으니, 한 청년이 스틱을 건넨다. 자기가 앞에 잡고 나더러 끝을 잡고 따라오라고 한다.
희망이 생긴다. 바람이 너무 세서 별 도움은 안되었지만, 의지가 된다. 따뜻함이 너무 고맙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걸을 수 있었다. 과자도 주고. 그는 스페인 청년이었다. 나의 천사였다.
바람이 조금 잦아들어 혼자 걷는다. 그러나 바람은 다시 세졌다. 발목에 쥐가 난다. 살도 없는 발목에서 쥐가
나다니... 걸을 수가 없다. 난 짐을 줄이느라 맨소래담도 가져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 앉아 있는데
길 앞에 앉아 쉬던 노부부가 괜찮냐고 물어 본다. 내 꼴을 보더니, 맨소래담같은 것을 가져다 발라준다.
신기하게 금방 풀렸다. 도움을 받은 김에 염치없이 물좀 달라고 했다. 물도 반통을 받았다. 그 물을 아껴 마시며
걸었다. 나무가 많은 지대로 들어가니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 준다. 무릎까지 오는 낙옆을 헤치며 걷는다.
이제 바람은 없겠지? 아니다. 나무가 없는 지대로 들어서자 바람은 정말 쉬지 않고 분다. 강하게, 아주 강하게...
도대체 이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양쪽 발목에 번갈아 가며 쥐가 난다. 바람에 버티느라 발목에 힘을 줘서 그런 것 같다. 어찌어찌 정상까지 갔다.
내려가는 길을 보니 눈이 쌓여 있다. 완전 급경사에... 게다가 금줄이 쳐져 있다. 난 스틱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구!
다시 발목에 쥐가 난다. 주저 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십여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서 주저 앉아 있다. 우회길로 가면 론세스바예스가지 20킬로라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난 빠른 길로 간다. 아까 도움을 준 노부부도 용감하게 금줄을 넘어간다. 나도 얼른 따라 갔다.
십여명의 사람 중 한국인 선영이도 같이 걸었다. 초입만 눈이 쌓여 있고, 길은 아주 좋았다. 바람도 전혀 없는 편안한 길이었다.
그렇게 2시간을 걸으니 론세스바예스... 눈물난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도 어지럽고 머리가 좌우로 앞뒤로 흔들리는 것 같다. 바람소리도 들리고...
걸으면서 앞으로 좋은 일 하고, 사람들에게도 잘 하겠다고 했다.
이 길만 가게 해준다면. 나에게 한걸음만 허락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 간절함, 절박함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들, 그들이 없었다면 난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난 절박한 누구에게 나의 마음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나? 나도 힘들다고 도망갔던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어려움과 고통을 기꺼이 나눈 적이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