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그 옆에 있는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제

프쉬케73 2023. 5. 7. 01:25

회의적이고 부정적 상황속에서 마음은 더 산만해져 갔다. 간신히 기대고 있던 나의 목표와 계획은 이 상황속에 다시 밀려들어갈 것 같았다. 
외롭고 복잡한 마음으로 만나 이 책은 나를 객관화하고 내 마음속 슬픔과 부조리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먼저 이 책은 아주 미국적이다. 아메리칸스타일... 왜냐하면 개인의 삶, 성취와 비극을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구조적 문제를 거의 설명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사회적 해결적으로 공산주의체제의 폭력과 비인간화를 나치즘과 같은 수준으로 비판한다. 인간이 표방한 선한 목표 이면에 있는 이를 실천하는 인간들의 마음, 성향이 이상적 목표를 처참한 비극으로 몰아간다고 말한다. 관련해서 이타심의 이면에 시기심이나 원한에 의한 복수심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방대한 내용 중 이 말만 떼어내어 주제로 삼으면 조선일보식 비난도 충분히 가능하다. 숭고한 희생과 열정을 매도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 주장을 정의롭고 바람직한 슬로건을 실천하는 인간의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내면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책의 주제는 나약하고 상처입은 인간이 끊이지 않는 고통속에서도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회와 정치의 책임을 다루지 않는다고 사회탓 하지 말고 개인이 노력해야 한다라는 상투적인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상황에서 보자면, 인권이나 노동권을 개인의  방패삼아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권리의 소비자들이 난무하는 상황에 너무 신물이 나서 저자인 조던B 피터슨의 이야기에  더 공감을 하는 것도 같다.  체제와 구조 탓을 하기 위해 개인을 너무 무력한 피해자로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구조가 바뀌지 않는한, 권력이 바뀌지 않는한 개인은 비극적 상황에 빠져 있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정의를 독점하고 확증편향을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정의는 상대적이므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랑할 것,  큰 변화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서 변화시켜야 한다. 이 점에서 마음에 새겨진 글이 있다. 
" 만약 당신이 이미 모든 것이고 어디에도 있다면, 굳이 가야 할 곳도 없고 굳이 뭔가 되려고 목표로 삼을 것도 없을 것이다. 과거에 존재할 수 있던 모든 것이 결국에는 존재하고, 과거에 일어날 수 있던 모든 사건이 결국에는 일어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한계가 없으면 어떤 이야기도 없으며, 어떤 이야기도 없으면 삶이 없다. ~ 그러나 존재와 한계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 기억해야할 가르침이 있다. "(471쪽)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여도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만 바퀴로 쓰임새가 있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도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만 그릇으로서 쓰임새가 있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들더라도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만, 방으로서 쓰임새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472쪽, '노자, 도덕경, 11장 비어있음으로 로 쓰임이 있다.')
인생은 고통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과정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고통을 유발하는 존재를 지워내면 사라질 줄 알고 문제로 지정하고 베어내는 선택을 해왔지만, 그것으로 다음, 다음의 문제에 계속 대응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깨닫게 되는 만틈 문제는 커지고 복잡해졌다. 이젠 베어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나 자신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그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면 고통도 없고, 삶도 없다.